Select menu item

소금과 빛의 삶을 살게 하소서!

소금과 빛에는 공통적인 중요한 속성이 있다.
쓸모 있게 되려면 둘 다 자신을 내주어야 한다.
다른 무언가와 섞여 스스로 희생되어야 한다.
빛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소금은 음식 속에 녹아 없어진다.
소금을 조금만 뿌려도 그 많은 반죽의 전체가 변한다.
순전히 양으로 볼 때 세계 인구 전체에서 진실한 그리
스도인의 비율은 다량의 음식물에 넣은 소금 몇 알갱이
에 견줄 만하다.
우리는 어두어져가는 세상속에서 고독한 그리스도인이며 적은 소수라 해서 한탄할 것 없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맛을 내게 하도록 부름 받았다.
이것이 고독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실제로 소금 한 알갱이의 위력이 막강한 효과를 낼 때가 얼마나 많은가?
미움과 다툼이 있는 공동체에서 한 사람이 용서를 실천하면
치유와 회복의 공동체로 변화된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장차 세상에 닥칠지도
모를 참사를 생각하거나 절망적인 미래에 체념해 있을 때,
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합리와 불합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을 뿜어낼 수 있다.
단지 그 자리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사람들에게 유통하면,
그 소금이 부패한 염려와 무력한 두려움 속에 작용한다.
다시 말하지만 고독한 그리스도인은 위대한 약속을 받았다.
고독한 그리스도인은 한 알갱이의 소금이다.
소금통에서 나와야만 성장할 수 있다
이를 공유하고 책임을 다하려면
당연히 소금통에서 나와야 한다.
소금통은 안정감을 느끼고 좋다.
그곳에는 선한 사람들이 있어
편하고 서로를 이해한다.
그들은 자신이 세상 사람들에게 물들거나
정치 때문에 더럽혀지거나
내면생활에 해를 입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리스도인은 소금통에서 자신이 가장 잘 보존될 줄로 생각하고 그안을 고수한다.
딴에는 지혜롭게 머리를 쓴 것이지만 오히려 그 행위 때문에 짠맛을 잃는다.
소금이 소금 구실을 하려면 반드시 자신을 내주어야만한다.
그런가 하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는 그리스도인
들도 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악한 세상에서 학교나 공장이나
사무실의 친구들 사이에 부는 바람 때문에 그저 자기 신앙의 등불이 꺼질까봐 두려워서다.
등불은 바람에 꺼지기는커녕 오히려 되살아난다.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 깜빡이는 촛불을 결코
꺼지게 두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촛불을 말 아래에 두면 그 불빛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산소가 떨어지면 지저분한 촛농과 심지만 남는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사는 인생 소금과 빛이 살아 역사하려면
자신을 보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내주고 희생해야만 한다.
성실한 소금이요 충성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스러운 하늘에서
빛나기로 하거나 하나님 나라의 쾌적한 기후속에 자신을 지켜 보존하기로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어두운 세상 속에 빛으로 오셔서, 불행하게 비틀거리고 휘청거리는
인류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셨다.
세상에 유예기간이 주어져 우리 모두가 아직 살아 있음은 순전히 예수님이 하늘의
소금통에 남지 않고 하늘의 말 아래에 숨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죄로 물든 세상 속에 내려와 베들레헴에서부터 갈보리까지,
모든 곳에 자신을 내주셨다.
이처럼 소금과 빛은 자신을 내주고
희생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모든 자기중심적 신앙과는 반대다.
소금의 희생은 은밀하게 이루어져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위해 독생자를 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야 한다.
분명히 세상은 우리가 희생하며 섬길 가치가 있다. 왜 그런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세상을 위해 자신의 피를 쏟으셨기 때문이다.
순전히 그분이 세상을 위해 먼저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이 땅의 작은 모퉁이에서
한 알갱이의 소금으로 살아가야 한다.
당신은 자신이 발붙이고 호흡하는
세상의 한 구석에서 작은 빛으로 존재해야 한다.
– 현실과 믿음 사이(헬무트 틸리케)